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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즘 사람들은 잘 모르는 88올림픽의 빛과 어둠
    라이프:정보:건강 2018. 9. 27. 22:03

    갑자기 비둘기 불어난것이 88올림픽 때문이었을까? 88올림픽은 어떻게 해서 열리게 된 것일까? 88올림픽은 과연 우리 모두에게 즐거운 행사였을까?

     


    우리나라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평창 동계 올림픽도 치렀고 2002년에는 월드컵 개최국이기도 했지만 이때는 88서울 올림픽이 가장 큰 국가 행사였다. 

    전 세계에서 159개국 13,304명의 선수가 참가했다. 이는 올림픽 사상 최대 규모였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은 미국을 비롯한 자본주의권 국가들이 참가를 거부했고 1984년 로스엔젤레스 올림픽에서는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권 국가들이 참가하지 않아 반쪽짜리 올림픽으로 치러진데 반해 서울 올림픽은 12년 만에 모두가 참가한 화합의 행사였다고 할 수있다.

    더군다나 우리나라는 분단국가라는 특이성 때문에 더욱 의미가 컸다. 그러나 북한이 참가하지 않았던 것은 좀 아쉬웠으나 개/폐회식에는 벽을 넘어서 라는 기본주제를 잘 구현했고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안겨주었다는 평을 받고 있다.

    단군이래 가장 큰 국제 행사였던 88서울 올림픽. 어떻게 해서 우리가 올림픽이라는 거대 행사를 유치할 수 있게 된 것일까?

    1978년 세계 사격선수권대회가 우리나라에서 열렸다. 당시 대한사격연맹 회장은 오랫동안 대통령 경호실장을 지낸 박종규씨였는데 대회가 끝나자 박정희 대통령에게 올림픽 유치를 건의했고 이걸 받아들인 박정희 대통령은 박종규씨를 대한체육회장에 임명하게된다. 본격적인 유치를 한번 해봐라 라고 힘을 실어준 것.

    그런데 이렇게 올림픽 유치를 나선 것은 당시의 정치상황 때문이었다는 시각도 많다. 당시는 유신시절이었는데 긴급조치를 발동해서 국민의 자유를 억압했기 때문에 민심이 뒤숭숭했고 이 관심을 돌리려는 시도였다는 뜻이다. 그러다가 1979년 10.26사태가 발발하면서 유야무야 되나 했으나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다시 올림픽 유치에 힘을 쏟게 된다.

    전두환 정권도 국민의 관심을 다른데 돌릴 필요는 있었다. 소위 3S정책이라고 스크린 스포츠 섹스 이 3가지 정책을 적극적으로 펴서 권력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했다. 그럼에도 올림픽 유치는 쉽지 않았다. 경쟁 도시인 일본의 나고야가 모든 면에서 서울보다 월등했기 때문.

     


    그러자 정부는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을 올림픽 유치 민간추진위원장에 임명한다. 그덕분이었을까,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IOC 위원장이 Seoul 이라고 외치며 올림픽 개최국이 되었다. 1981년 9월 30일 독일의 바덴바덴에서 열린 총회의 기록은 서울 52표, 나고야 27표로 약 2배의 차이가 났다고 한다. 우리나라가 아시아에서 2번째, 세계에서 16번째로 올림픽 개최국이 되었다.

    이렇게 확정된 88서울올림픽은 많은 것을 변화시켰다. 전국 어디서나 88이라는 숫자와 마스코트인 호돌이라는 단어가 넘쳐났고, 전화카드가 통용되기 시작했으며 각종 자판기가 지하철을 비롯한 공공장소에 설치되었다. 화장실도 크게 달라졌는데 더러웠던 공중화장실에 수세식 변기와 세면대가 설치되었다. 모든 외국인들의 편의를 위해서였던 것이다.

    또 외국인을 위해서 1시간 일찍 일어나는 썸머타임을 적용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와 미국 유럽등의 시차와 중계방송 시간대를 고려한 조치였다. 이 제도로 직장인과 학생들은 1시간 일찍 일어나서 출근하거나 등교해야만 했다.

    철도에서는 새마을호가 가장 빠른 기차로 등장하기도 했다. 1987년 7월, 첫 운행을 시작했는데 정차역이 서울, 대전, 대구, 부산 딱 이 4곳 뿐인 쾌속 특급 열차였다. 지금으로치면 KTX나 SRT급인 셈.

    그리고 성화가 봉송되는 군부대 주변 강가에는 왠만한 크기의 돌이 모두 사라졌다는 말이 돌기도 했다. 지금도 군부대 주변이 반듯하게 쌓아올린 돌담으로 된 곳이 많은데 당시 성화가 봉송된다는 이유로 군인들을 동원해서 돌담을 쌓았다. 이 때 돌을 강가에서 실어왔는데 하도 많은 돌들이 필요해서 왠만한 크기의 돌들은 강가에서 모두 사라졌다는 얘기다. 전 세계에 대한민국의 모습을 잘보이게 하려고 많은 공을 들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했나 싶은 어두운 면도 있다. 예를 들면 대로변에 있던 보신탕 집들이 모두 자취를 감추었는데 이들은 뒷골목으로 밀려나서 영양탕, 보양탕 등이 이름으로 바뀌어 장사를 해야했고 도시의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부랑자, 노숙인, 신체지체 장애인들을 수용시설에 가둬놓기도 했다. 미관을 해친다고 시민들을 가두었다니 믿지 못할 일이다.

    서울 상계동, 김포공항에서 도심으로 들어오는 도로 주변의 판자집들은 성화봉송로 주변에 있다는 이유로 철거되었다. 삶의 터전을 하루아침에 잃은 사람들은 다른 지역으로 뿔뿔히 흩어져야만 했다. 88올림픽이 기억하기 싫은 사람도 많을 것 같다고 생각되는 대목이다. 전국이 지구촌 축제로 들썩였지만 하루아침에 집을 강체철거당한 이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한편 비둘기들이 지금처럼 불어난 이유가 88올림픽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진 사람들도 있는데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이라는 이유로 88올림픽 이전부터 크고작은 각종 행사에 동원되었다. 88올림픽 개최가 확정되면서 86년 아시안 게임도 우리가 치르게 되었는데 비둘기를 많이 날린건 사실이다. 각각 비둘기 3천마리 방사를 방사했고 한강에 비둘집을 지어 살게 했다. 이후에도 각종 스포츠대회 등의 행사에서 비둘기를 날리는 퍼포먼스를 보였는데 이 과정에서 비둘기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즉 88올림픽 때문이라고만은 할 수 없지만 기폭제가 된 것은 사실.

    그러나 안타깝게도 88올림픽 개막식때는 비둘기가 불에 타 죽기도 했다. 비둘기를 날려보내는 행사 후에 성화대에 성화를 점화 했는데 마침 성화대에 앉아 있던 비둘기들이 피하지 못하고 타 죽은 것이다. 이때문에 2012년 미국 타임지는 역대 최악의 올림픽 개막식으로 88서울 올림픽 개막식을 선정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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